선녀의 옷은 비단이 아닌 후드티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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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 min readApr 11, 2021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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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아무튼, 후드티”를 읽고서

이전부터 각종 행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 조경숙(또는 갱) 작가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.

작가는 개발자이며 그 외 십대여성인권센터 IT지원단 women do IT팀 활동가, 테크-페미 활동가, 만화 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신다.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.

책은 후드티 한 벌에서 시작된다. 과거부터 현재까지 후드티를 통해 본인이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보여준다.

초반부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. 작가는 일상의 폭력을 견디기 위해 현실 갑옷, 후드티를 입고 만화와 게임에 시간을 쏟는다. 나 또한 10대를 유쾌하지 않게 보냈고, 공부 대신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파묻혀 지냈다. 그래서 초반은 공감과 위로를 받으며 읽었고 후반은 마음 아픈 시절을 보냈어도 성장할 수 있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하고 다짐과 존경의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.

후드티 입은 여자는 어디든 간다. 최소한 옷에 관해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. 아름다운 옷이 주는 효용도 물론 있다. 나는 그 아름다운 옷들이 나름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훨씬 더 편해졌으면 한다. ‘옷이 날개’가 되려면, 말 그대로 옷이 날개가 되어야 한다. 날개의 효능은 멋이 아니라 날아가는 데 있다.

책에도 나와있듯이 여성 의류 중 대부분 주머니가 없다. 주머니가 옷의 맵시를 망친다는 이유 때문이다. 주머니가 없어서 맵시가 더 살고 스타일리시함을 강조하는 설명은 쇼핑몰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.
개중에는 정말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을 주머니라고 해두거나, 주머니가 있는 것처럼 주머니 모양으로 박음질만 해둔 옷도 있다. 여성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하게 만드는 옷을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? 오히려 후드티를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. 작가의 말대로 날개의 효능은 멋이 아니라 날아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. 그래서 작가는 선녀의 옷을 비단옷이 아닌 후드티로 묘사한다. 그리고 작가와 마찬가지로 선녀 또한 후드티를 입고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간다.

육아휴직 중 생긴 권고사직, 하청 직원에 대한 차별 등 힘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이 없어도 되는 사람도, 없는 사람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임을 말하며 어디든 나는 듯이 뛸 수 있다고 말한다.
작가가 또 어디에서 어떤 후드티를 입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.
그리고 나 또한 무력함에 냉소하는 대신 여기 발을 딛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다시 다짐해본다.

아래는 유독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이다.

우리가 달리는 건 100미터 코스가 아니니까. 힘들면 쉬어가고, 지치면 바통을 서로에게 맡기면서, 갈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어 달리고 싶다. 무엇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어달리기에 후드티는 정말이지 너무 좋은 동료가 아닌가.

회사는 노동자를 언제든 갈아 끼워도 되는 부품처럼 여길지 몰라도, 그 부품으로 일하는 동안 최소한 나여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.

하나하나 다시 돌이켜봐도 그 후드티를 입고 내가 다닌 곳들, 만난 사람들 모두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. 그 후드티를 입었기에 그곳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그 후드티들을 입고서 나는 거기에 있었다. 내게 그 후드티들은 없어도 되는 옷들이 아니라 지금은 없지만 그때그때 나에게 특별했던 옷들이다. 마찬가지로 나 역시 ‘없어도 되는 사람’이었던 적은 없다. 나는 없어도 되는 사람도, 없는 사람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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